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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르 라퐁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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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카르 라퐁텐은 독일의 정치인으로, 자를란트주 주총리, 독일 사회민주당(SPD) 당수, 연방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1960년대에 물리학을 전공하고, 1970년대부터 자를란트주 정치에 참여하여 자를브뤼켄 시장을 지냈다. SPD 내 좌파로 활동하며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정책을 비판했고, 1985년부터 1998년까지 자를란트주 주총리를 역임하며 지역 산업 보호에 힘썼다. 1990년 총리 후보로 나섰으나 피습 사건을 겪었고, 이후 SPD 당수로 활동하다가 1998년 재무장관을 지냈다. 2005년 SPD를 탈당하여 좌파당 결성을 주도했으며, 2024년에는 사라 바겐크네흐트 연합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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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르 라퐁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7년의 오스카르 라퐁텐
2017년의 라퐁텐
이름오스카르 라퐁텐
원어 이름Oskar Lafontaine
로마자 표기'Oskar Lafontaine'
출생일1943년 9월 16일
출생지자를라우테른, 나치 독일 자를란트 (현재 자를루이, 독일)
거주지메르치히-질빙엔
국적독일
직업정치인
언론인
물리학자
학력자를란트 대학교 (디플롬)
정당
현재 소속 정당BSW(2023년~현재)
과거 소속 정당SPD (1966년~2005년)
WASG (2005년~2007년)
좌파당 (2007년~2022년)
무소속 (2022년~2023년)
가족 관계
배우자잉그리트 바허트 (1967년 결혼, 1982년 이혼)
마르그레트 뮐러 (1982년 결혼, 1988년 이혼)
크리스타 뮐러 (1993년 결혼, 2013년 이혼)
자라 바겐크네히트 (2014년 결혼)
자녀2명
공식 웹사이트
공식 웹사이트공식 웹사이트
주요 직책
사회민주당 사무총장프란츠 뮌테페링
오트마르 슈라이너
사회민주당 대표 임기 시작1995년 11월 16일
사회민주당 대표 임기 종료1999년 3월 12일
사회민주당 대표 전임루돌프 샤르핑
사회민주당 대표 후임게르하르트 슈뢰더
좌파당 공동 대표로타르 비스키
좌파당 대표 임기 시작2007년 6월 16일
좌파당 대표 임기 종료2010년 5월 15일
좌파당 대표 전임직책 신설
좌파당 대표 후임클라우스 에른스트
총리게르하르트 슈뢰더
재무부 장관 임기 시작1998년 10월 27일
재무부 장관 임기 종료1999년 3월 18일
재무부 장관 전임테오도르 바이겔
재무부 장관 후임한스 아이헬
자를란트 주지사 임기 시작1985년 4월 9일
자를란트 주지사 임기 종료1998년 11월 9일
자를란트 주지사 전임베르너 자이어
자를란트 주지사 후임라인하르트 클림트
연방 상원 제1 부의장베른트 자이테
연방 상원 의장 임기 시작1992년 11월 1일
연방 상원 의장 임기 종료1993년 10월 31일
연방 상원 의장 전임베른트 자이테
연방 상원 의장 후임클라우스 베데마이어
자르브뤼켄 시장 임기 시작1976년 1월 22일
자르브뤼켄 시장 임기 종료1985년 4월 9일
자르브뤼켄 시장 전임프리츠 슈스터
자르브뤼켄 시장 후임한스-위르겐 쾨브니크
의회 경력
자를란트 주의회 의원 임기 시작2009년 9월 23일
자를란트 주의회 의원 임기 종료2022년 4월 25일
자를란트 주의회 의원 전임다수 의원 선거구
자를란트 주의회 의원 후임다수 의원 선거구
연방의회 의원 임기 시작2005년 10월 18일
연방의회 의원 임기 종료2010년 2월 1일
연방의회 의원 전임다수 의원 선거구
연방의회 의원 후임이본 플뢰츠
연방의회 의원 임기 시작1998년 10월 26일
연방의회 의원 임기 종료1999년 3월 16일
연방의회 의원 전임본인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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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의회 의원 임기 시작1994년 11월 15일
연방의회 의원 임기 종료1994년 11월 17일
연방의회 의원 전임본인 (1990년)
연방의회 의원 후임엘케 페르너
자를란트 주의회 의원 임기 시작1985년 4월 9일
자를란트 주의회 의원 임기 종료1998년 11월 9일
자를란트 주의회 의원 전임다수 의원 선거구
자를란트 주의회 의원 후임카린 라발
자를란트 주의회 의원 임기 시작1970년 7월 13일
자를란트 주의회 의원 임기 종료1975년 7월 14일
자를란트 주의회 의원 전임다수 의원 선거구
자를란트 주의회 의원 후임다수 의원 선거구

2. 생애와 교육

오스카르 라퐁텐은 자를루이에서 태어나 딜링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프륌의 레기노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본 대학교와 자를란트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에는 자르브뤼켄의 VVS(Versorgungs- und Verkehrsgesellschaft|페어조르군스 운트 페어케어스게젤샤프트de)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2. 1. 어린 시절과 가족

자를루이기술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가문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이다. 그의 부친 한스 라퐁텐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전사하였다. 오스카르는 어린 시절을 딜링겐에서 모친 카테리네(옛 성씨 페르너)와 쌍둥이 형 한스 2세와 함께 보냈다.

프륌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주교 기숙사 학교에 입학하여, 레기노 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았다. 1962년 학교를 떠난 후, 독일 가톨릭 교회의 장학재단인 쿠자누즈베르크에서 장학금을 받아 본 대학교와 자를란트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969년 타이타늄산 바륨의 단결정 생산에 관한 논문을 써서 졸업하였다. 1974년까지 자르브뤼켄의 VVS(Versorgungs- und Verkehrsgesellschaft|페어조르군스 운트 페어케어스게젤샤프트de)에서 근무하였고, 1971년부터는 이사회에서 활동했다.

라퐁텐은 네 번 결혼했다.

  • 1967년 ~ 1982년: 인그리드 바허트
  • 1982년 ~ 1988년: 예술가 마르그레트 뮐러 (아들 프레데릭, 1982년생)
  • 1993년 ~ 2013년: 크리스타 뮐러 (아들 카를-모리스, 1997년생)
  • 2014년 ~ 현재: 사라 바겐크네흐트 (2011년 11월 교제 발표[3], 2014년 12월 22일 결혼[4])


그는 실천적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5]

2. 2. 학업

프륌로마 가톨릭교회 주교 기숙사 학교에 다니며 레기노 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았다. 1962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독일 가톨릭 교회의 장학재단인 쿠자누즈베르크에서 장학금을 받아 본 대학교와 자를란트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1969년 타이타늄산 바륨의 단결정 생산에 관한 논문으로 졸업했다.

2. 3. 초기 경력

프륌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주교 기숙사 학교에 다녔으며, 그곳의 김나지움(Regino-Gymnasium|레기노 김나지움de)에서 교육을 받았다. 1962년 학교를 떠난 후, 독일 가톨릭 교회의 장학금 재단인 쿠자누즈베르크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본 대학교와 자를란트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라퐁텐은 1969년 단결정 티탄산 바륨 생산에 관한 논문으로 졸업했다. 그는 졸업 후 1974년까지 자르브뤼켄의 Versorgungs- und Verkehrsgesellschaft|페어조르군스 운트 페어케어스게젤샤프트de(VVS)에서 근무했으며, 1971년부터는 이사회에서 활동했다.

3. 정치 경력

자르브뤼켄 시장으로서 활동하며 지역 정치 기반을 다졌고,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추진한 페르싱 II 미사일 배치 계획을 비판하며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1985년부터 1998년까지 자를란트주 총리를 역임하며 지역의 철강석탄 산업 보호에 힘썼으며, 재임 중 잠시 독일 연방상원 의장을 맡기도 했다.

3. 1. 정치적 초기 활동 및 사상

대학 재학 중 평화주의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영향으로 사회 비판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고, 1966년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68년 잘란트주 당 집행부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주의회 의원을 지냈다. 1977년부터는 잘란트주 당 대표를 역임했다(1996년까지).

1974년 사르브뤼켄 부시장을 거쳐 1976년 시장으로 선출되어 1985년까지 재임했다. 사르브뤼켄 시장으로서 지역 사회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당시 총리였던 헬무트 슈미트가 추진하던 독일 내 페르싱 II 미사일 배치 계획을 비판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는 나토(NATO)의 군비 확장 계획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었다.

3. 2. 자를란트 주총리 (1985-1998)

1977년부터 잘란트주 독일 사회민주당(SPD) 대표를 맡았던(1996년까지) 라퐁텐은 1985년 주의회 선거에서 승리하여 자를란트주 총리가 되었다.[2] 그는 1990년1994년 선거에서도 승리하여 1998년까지 총리직을 유지했다.[2] 주총리로서 그는 철강 생산과 석탄 채굴에 기반한 자를란트주의 산업 기반을 보조금을 통해 유지하고자 노력했다.[1][2] 또한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독일 연방상원 의장을 겸임하기도 했다.[2] 재임 기간 중 과거 자르브뤼켄 시장 시절 과도한 퇴직금을 수령하거나 스캔들, 주 내 언론 규제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자를란트주 내에서는 여전히 높은 지지를 유지했다.[2]

3. 3. SPD 좌파로서의 활동

오스카르 라퐁텐은 SPD 당내에서 좌파적 목소리를 내는 인물로 명성을 얻었다. 그가 처음 정치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 평화 운동이 확산되면서부터였다. 특히 당시 서독 총리였던 같은 당 소속 헬무트 슈미트가 추진하던 나토미사일 배치 강화 계획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당내 좌파의 입장을 대변했다. 라퐁텐은 한스 에플러(Hans Eppler), 젊은 세대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과 함께 서독의 나토 탈퇴까지 요구하며 슈미트 총리와 대립각을 세웠다. 하지만 당내 다수는 슈미트의 정책을 지지했고, 이에 라퐁텐은 슈미트를 향해 "강제수용소도 경영할 수 있다"는 과격한 비판을 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사과했다. 그는 1983년 대규모 미사일 배치 반대 시위에도 작가 하인리히 벨 등과 함께 참여하며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87년, SPD의 빌리 브란트 당수가 은퇴하며 세대교체를 위해 라퐁텐을 후계 당수로 지명했지만, 그는 이를 고사했다. 이후 한스-요헨 포겔이 당수로 선출되었고, 라퐁텐은 요하네스 라우와 함께 부당수직을 맡았다. 그는 새로운 당 강령 작성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1989년 당 대회에서 새로운 강령을 발표했다. 이 강령에는 국제 협력을 통한 군축, 남녀 고용 기회 균등, 경제의 환경 보호 노력 강화, 사회 보장 제도의 구조 개혁 등 진보적인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산업계와의 타협 없는 노동 시간 단축 요구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여 노동조합과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한편, 라퐁텐은 1985년부터 1998년까지 자를란트 주 총리를 지내며 철강 생산과 석탄 채굴에 기반한 지역 산업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3. 4. 독일 통일과 라퐁텐

베를린 장벽 붕괴를 시작으로 동서 독일 통일을 향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라퐁텐은 당시의 일반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1][2] 그는 동독의 급속한 붕괴와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구 연합국의 개입 및 정치적 혼란을 우려했다.[2] 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동독에 대한 경제 지원을 제공하는 동시에, 동독 주민들의 서독 이주를 제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2]

그러나 이 방안은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던 당시 여론의 큰 비판에 직면했다. 당시 SPD 당수였던 한스-요헨 포겔조차 "벽이 무너졌는데 또 만들겠다는 건가"라며 라퐁텐의 제안을 비판할 정도였다.[2] 라퐁텐은 이러한 국민적 열광 분위기를 경계하며, 특히 통일된 독일이 NATO 회원국으로 남는 것에 대해 "역사적인 큰 실수"가 될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2]

그는 당시 헬무트 콜 총리가 추진하던 신속한 통일 방안을 통렬하게 비판했다.[2] 대신 동독이 성급하게 서독과 통합하기보다는 독자적인 개혁을 통해 스스로의 입지를 강화한 후, 유럽 통합이라는 더 큰 틀 안에서 서독과의 점진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

3. 5. 1990년 총리 후보 및 피습 사건

1990년 라퐁텐의 선거 포스터


독일 통일의 격동기 속에서 오스카르 라퐁텐은 1990년 통일 독일 첫 연방의회 총선을 앞두고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총리 후보로 선출되었다. 당시 재통일을 이끈 헬무트 콜 총리의 기민련(CDU) 정부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어 라퐁텐에게는 매우 어려운 선거였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급물살을 타던 통일 논의 과정에서 라퐁텐은 신중론을 펼치며 독자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는 동독의 급속한 붕괴와 일방적인 서독 흡수 통일 방식이 가져올 정치적 혼란을 우려했다. 또한, 통일 독일이 NATO에 잔류하는 것에 대해 "역사적인 큰 실수"가 될 것이라고 비판하며, 헬무트 콜 총리의 통일 구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라퐁텐은 동독이 성급한 통합 대신 독자적인 개혁을 통해 입지를 강화한 후, 유럽 통합의 큰 틀 안에서 서독과 점진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중론은 통일에 대한 국민적 열망과 당내 주류 의견과는 거리가 있었고, "벽이 무너졌는데 또 만들겠다는 건가"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총리 후보로서 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1990년 4월 25일, 라퐁텐은 쾰른에서 연설을 마친 직후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여성에게 로 목을 찔리는 피습을 당했다. 이 공격으로 경동맥이 심하게 절단되는 중상을 입고 여러 날 동안 위독한 상태에 놓였다.

라퐁텐이 입원해 있는 동안, SPD 연방의원단은 그의 신중론적 통일 방침을 사실상 폐기하고 신속한 동서독 통일에 찬성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라퐁텐은 이에 반발하여 총리 후보직 사퇴 의사를 밝혔으나, 당내에 마땅한 대체 후보가 없어 결국 후보직을 유지하게 되었다.

독일 통일은 연합국의 승인 아래 빠르게 진행되어 1990년 10월 3일에 실현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SPD는 득표율 33.7%라는 참패를 당했고, 라퐁텐은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연방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자를란트주 주총리직에 집중하게 되었다.

3. 6. SPD 당수 (1995-1999)

1995년 만하임 당대회에서 예상치 못한 움직임으로 루돌프 샤르핑을 누르고 SPD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라퐁텐은 당시 헬무트 콜 총리가 이끄는 기독교 민주연합(CDU) 정부에 맞서 SPD의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수년간 독일 정치를 특징지었던 초당적 협력 정책을 비판하며, 콜 정부에 협력하는 것은 그의 집권을 연장시킬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전략은 1998년 9월 총선에서 SPD가 예상 밖의 큰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총선 승리 후, 라퐁텐은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끄는 첫 내각에서 연방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3. 7. 연방 재무장관 (1998-1999)

1998년 9월 독일 사회민주당(SPD)가 총선에서 예상 외로 압승한 후, 라퐁텐은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첫 번째 내각에서 연방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재무장관으로서 짧은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유럽 연합(EU) 차원의 신속한 세금 조화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러한 정책은 영국의 세금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특히 영국의 유럽회의론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6] 1998년,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인 ''더 선''(The Sun)은 라퐁텐을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9년 3월 11일, 라퐁텐은 슈뢰더 총리와의 경제 정책에 대한 이견과 내각 내 '협력 부족'을 이유로 들며 연방 재무장관직뿐만 아니라 SPD 당수직과 연방의원직까지 모두 갑작스럽게 사임했다. 그는 훗날 저서에서 내각 내 협력 부족 외에도, 1990년 피습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어 정치보다는 가족을 위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입각 후의 고통이 이를 더욱 부추겼다고 설명했다.

3. 8. SPD 탈당과 좌파당 창당 (2005-)

2005년 5월 24일, 슈뢰더 정권의 신자유주의 노선과 하르츠 IV 개혁 프로그램에 반대하며 독일 사회민주당(SPD)을 탈당했다.[7] 이후 6월 10일, 서독 지역 기반의 노동과 사회 정의를 위한 선거 대안(WASG)과 구 동독 집권당 사회주의통일당(SED)의 후신인 민주사회당(PDS)의 연대 선거 명부 최고 후보로 나서겠다고 발표하며 사실상 좌파 정당 연합을 이끌었다. 그는 6월 18일 WASG에 공식 입당했다.[7]

2005년 9월 연방의회 선거에서 라퐁텐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WASG-PDS 연합 명부 후보 및 자르브뤼켄 지역구 후보로 출마했다. 비록 지역구에서는 낙선했으나, 비례대표 명부를 통해 당선되어 연방의회에 복귀했으며, 그레고어 기지와 함께 좌파당 연방하원 교섭단체 공동대표로 선출되었다. 특히 그의 정치적 기반인 자를란트주에서는 좌파당이 서독 지역 연방주 중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선거 운동 중이던 2005년 6월 켐니츠 유세에서 "국가는 외국인 노동자(Fremdarbeiter)가 저임금으로 가장들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발언했는데, 'Fremdarbeiter'라는 단어가 나치 시대에 사용된 용어라는 점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협력 관계였던 PDS 내부에서조차 독일 국가민주당(NPD) 지지자들의 표를 의식한 발언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라퐁텐은 인종주의적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했지만, 일부 정치학자들은 그가 이념보다는 권력 의지가 강하며 사회 불안과 반미주의 등을 이용하는 포퓰리스트적 성향을 보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2007년 6월 15일, WASG와 PDS는 공식적으로 합당하여 좌파당(Die Linke)을 창당했으며, 라퐁텐은 로타르 비스키와 함께 초대 공동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2009년 5월, "금융 자본주의는 실패했다. 경제를 민주화해야 하며, 노동자들은 회사 운영에 더 많은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좌파당의 노선을 분명히 했다.[8]

2009년 자를란트주 주의회 선거에서는 주총리 후보로 나서 선거를 이끌어, 좌파당이 득표율 20%를 얻어 제3당으로 도약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선거 후 자를란트 주의회 좌파당 교섭단체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연방의회 교섭단체 공동대표직 사임을 발표했고, 11월에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2010년 1월, 연방의회 의원직과 당 대표직에서 물러날 것임을 발표하며 연방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3. 9. 최근 활동

2009년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2010년 2월 연방의회 의원직과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며 사실상 중앙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다만, 자를란트주 의회 의원직 등 지역 정치 활동은 계속 이어갔다.

2011년에는 동독 출신의 좌파당 정치인 자라 바겐크네히트와 연인 관계임을 공개하여 주목받았다.

2022년 독일 정치에 대한 NATO와 미국의 영향력을 강하게 비판하는 책 ''미국, 갈 시간이야''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독일이 미국의 종속국이 되었다고 주장했으며, 출간 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9][10]

2024년 1월,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창당한 신당 사라 바겐크네히트 연합 (Bündnis Sahra Wagenknecht) (BSW)에 합류한다고 발표했으며,[11] 같은 달 27일에 열린 창당 당대회에서 연설했다.[12][13]

4. 논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라퐁텐은 사민당 내 좌파 성향에도 불구하고 친기업 정책을 옹호하고 이민자 및 망명 신청자 수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좌파 지지 기반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2005년 한 행사에서는 Fremdarbeiter|프렘다르바이터de(나치 정권 시절 사용된 "외국인 노동자"라는 의미로,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 용어)가 독일 노동자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큰 비판을 받았으며, 라퐁텐은 나중에 실수였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독일의 저명한 작가들은 《디 벨트(Die Welt)》에 기고한 글을 통해 라퐁텐이 의도적으로 혐오적인 감정을 자극하고 극우 성향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려 했다고 비판했다.[14]

라퐁텐은 "사회 정의의 궁전"(Palast der sozialen Gerechtigkeitde)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호화로운 저택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과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생활 방식이 그의 사회주의적 신념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좌파 정치인이 반드시 가난해야 할 필요는 없으며 중요한 것은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답했다.[16]

또한 같은 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는 풍력 발전 확대가 독일의 문화 경관을 파괴한다는 이유를 들어 비판적인 입장을 나타냈다.[17] 이에 대해 알리안츠 90/녹색당(Alliance 90/The Greens)의 대표 후보였던 바바라 마이어-글루체는 라퐁텐이 "비이성적인 공포를 조장한다"고 반박했다.[18]

5. 사생활

라퐁텐은 네 번 결혼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 아내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다.

기간배우자자녀
1967년 ~ 1982년인그리드 바허트-
1982년 ~ 1988년마르그레트 뮐러아들 프레데릭 (1982년생)
1993년 ~ 2013년크리스타 뮐러아들 카를-모리스 (1997년생)
2014년 12월 22일 ~ 현재자라 바겐크네히트-



2011년 11월, 라퐁텐은 자신보다 26살 어린 동료 정치인 자라 바겐크네히트와 연인 관계임을 공식 발표했다.[3] 라퐁텐은 2013년 2월 크리스타 뮐러와 이혼했으며, 2014년 12월 22일부터 자라 바겐크네히트와 결혼한 상태이다.[4]

그는 실천적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5] 가계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이다.

6. 저서


  •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선택》(社会民主主義の新しい選択일본어)
  • 《국경을 넘는 사회민주주의》(国境を超える社会民主主義일본어)
  •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心臓は左側で鼓動する일본어)

참조

[1] 뉴스 Rückzug als Linken-Chef http://www.spiegel.d[...] 2010-01-24
[2] 웹사이트 Ehemaliger Vorsitzender: Lafontaine tritt aus Linkspartei aus https://www.tagessch[...]
[3] 웹사이트 Lafontaine und Wagenknecht – Linke Liebe http://www.sueddeuts[...] 2012-03-20
[4] 뉴스 Oskar Lafontaine und Sahra Wagenknecht haben geheiratet https://www.faz.net/[...] 2015-03-21
[5] 웹사이트 Deutscher Bundestag: Lafontaine, Oskar http://www.bundestag[...] 2015-09-16
[6] 뉴스 Lafontaine and Brown clash over Euro tax veto https://www.newspape[...] 2024-06-05
[7] 웹사이트 FT.com / Europe – New leftwing alliance to challenge SPD http://news.ft.com/c[...] 2005-06-13
[8] 웹사이트 Interview with Left Party Leader Oskar Lafontaine: 'We Want to Overthrow Capitalism' – SPIEGEL ONLINE – News – International http://www.spiegel.d[...]
[9] 뉴스 Oskar Lafontaine rechnet mit Scholz ab: "Wir haben die dümmste Regierung Europas" https://www.derweste[...] 2022-12-08
[10] 뉴스 Europe's anti-American itch https://www.politico[...] 2022-12-08
[11] 웹사이트 Oskar Lafontaine tritt bei Wagenknecht-Partei ein. https://www.spiegel.[...] 2024-01-25
[12] 웹사이트 Oskar Lafontaine Hauptredner bei BSW-Gründungsparteitag https://www.deutschl[...] 2024-08-06
[13] 웹사이트 Rede von Oskar Lafontaine - 1. Parteitag des BSW Berlin 27 January 2024 https://www.youtube.[...] 2024-08-06
[14] 웹사이트 Writers warn about Linkspartei http://www.signandsi[...] signandsight 2012-06-03
[15] 웹사이트 Palast der sozialen Gerechtigkeit http://www.n-tv.de/5[...]
[16] 웹사이트 Linkspartei: Der Charmeur und der Chef – Bücher – Feuilleton – FAZ.NET https://www.faz.net/[...]
[17] 뉴스 Wie Windräder die Umwelt zerstören https://www.faz.net/[...]
[18] 웹사이트 Energiewende: Panikmache von Oskar Lafontaine https://gruene-saar.[...] 2017-03-15
[19] 서적 Duden Aussprachewörterbuch Duden
[20]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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